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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신독재 김집 신도비와 묘소 촬영기

by 仲林堂 김용헌 2017. 10. 15.

송백헌 충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7월 "연산에 뿌리를 둔 광산김씨 이야기"란 책을 쓸 려고 한다면서 나에게 동참을 요청했다. 어느 문중이나 집안 내력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광산김씨 연산입향조 관찰사공 김약채의 며느리인 양천허씨가 개성에서 연산으로 내려 올 때 호랑이가 안내를 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이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 이번 책자 발간의 취지이다.


원고 수집에 여러분이 참여했고, 나도 내가 속한 판교공파, 그 외에 직제학공파, 퇴촌공파, 총제공파 등에서 원고를 수집했고, 여러분이 수집한 원고를 송교수께서 7월 5일 나에게 수정 보완 요청이 있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원고를 수정해서 보냈다.

   

이번에는 원고에 포함 될 관련 유적의 사진 촬영을 내가 나서 하겠다고 했고, 10월 13-14일 논산, 대전, 계룡에 751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이번 촬영에서 유적지를 찾아 가는데 용준, 용성, 용원, 영도 일가의 도움을 받았다. 강경에 있는 죽림서원과 팔쾌정, 그리고 벌곡에 있는 신독재 묘소는 안내 없이 나 혼자 찾았다. 특히 13일 마지막으로 찾은 신독재 묘소는 인적이 없는 곳이라 크게 어렵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의 탐험 같았다.


벌곡면 양산리에서 도착하니 해는 기울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혼자서 하나의 전설이 내려오는 한삼천느티나무를 찾아 촬영했다. 그리고 신독재 묘소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벌곡면사무소에 들렸다. 면사무소 한 직원이 컴퓨터에서 검색 화면을 보여주면서 "한삼천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진입하여 첫 번째 갈림길에서는 우측으로 가고, 다음 갈림 길에서는 좌측으로 가라"고 했다. 


면사무소 직원 안내에 따라 한삼천느티나무 갈림길에서 진입하여 아마 1km 포장 도로를 달렸다. 그 다음부터는 비포장이지만 차가 많이 다녀 첫번째 갈림길이 있는 곳까지는 어렵지 않게 갔다. 길은 계곡을 타고 갔다. 좌측 길은 차가 많이 다닌 좋은 길이고, 내가 찾는 우측길은 험한 길이다. 이 때부터 민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5분쯤 달린 후 두번째 갈림길을 만났다. 이번에는 좌측 길은 차가 별로 안 다닌 길이고, 우측은 차가 많이 다닌 길이다. 좌측 길은 차 다닌 흔적이 조금밖에 없어 불안했다. 그래서 안전한 우측 길을 선택했다. 한 참을 올라가니 큰 평지가 나타났고, 그곳에 태양광 시설이 보였다. 아마 이것 때문에 차가 많이 드나들었던 것 같았다. 둘러 보니 신독재 선생의 사당이나 묘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차를 돌려 삼거리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한 이백여 미터를 가니 큰 나무가 멀리 보였다. 맞게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500여 미터를 올라가니 식목한 것으로 보이는 고목이 있었다. 멀리 재실로 보이는 기와집이 보였다. 


재실 앞에 도착하니 여러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평지다. 기와집은 옛 재실로 보이나 문은 닫혀 있어 안쪽은 볼 수 없었다. 우측편으로 난 길에 작은 비석 하나가 있다. 신독재 묘소가는 길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실 우측으로 돌아서니 차 다닐 수 있는 시멘트 포장 길이다. 길 아래를 보니 깊은 골자기다. 이곳은 인적이 하나 없는 원시림 같다. 길은 골자기를 따라 산 위로 올라 갔다. 5분여 서둘러 올르니 갈지자로 돌아가는 모퉁이에 신도비가 있었다. 


신도비(神道碑)를 보니 산속에서 큰 보물을 만난 듯 반가웠다. 비석은 대인으로 거듭나서 우뚝 서서 찾는 이를 맞이 하고 있는듯 했다. 그 자태를 카메라에 담았다. 해는 기울어 광이 부족했으나 ISO(감도)를 올리고 찍으니 그런대로 나왔다. 여러 각도로 찍어 보고 노출을 조정하면서 여러 장을 찍었다.

 

신도비에서 다시 길은 급하게 올라 간다. 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지만 양쪽 산에서 나온 가시가 있는 나무 가지가 뻗어 있어 트럭이면 몰라도 승용차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둠이 바로 내리고 있어 서둘러 길을 따라 100여미터 오르니 능선이 보이면서 시야는 넓어지고, 드디어 묘소가 눈에 들어왔다. 신독재 선생의 묘가 뒤에 있고, 선생의 후처인 덕수이씨의 묘가 앞에 있었다. 묘역에는 상석, 문인석, 석주, 묘비가 있었다. 묘표에는 문경공 신독재 김집선생지묘라고 쓰여 있다. 이 비는 1659년  이유태가 찬(撰)하고 윤선거가 서(書)했다. 전자(篆字)은 김만기가 썼다. 묘비는 이 깊은 산속에 묘소가 있다는 것도 놀랍고, 이렇게 잘 가꿔진 산소를 보면서 역시나 그 선조에 그 후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을 숭상하는 마음이 가슴에 차 왔다. 공과 같이 신독(愼獨)하는 자세로 늘 바른 마음을 갖고 걷길 바라면서 재배했다. 그리고 사진을 촬영했다. 


이곳은 앞으로 수백년이 지나도 도시화가 되지 않을 것만 같은 깊은 산중이다. 이 묘소는 수백년 수천년 변치 않고 이 자리를 지킬 것만 같다. 오랫동안 변함없이 지킬 수 있는 이곳이야 말로 최고의 명당이 아닐 가? 생각하면서 하산했다.   




문경공 신독재 신도비이다. 높이 193Cm, 폭 95cm, 두께 24cm이다.


신독재 묘소 가는 길이다. 멀리서도 큰 가로수가 보인다.


멀리 기와집이 하나 보인다.


예전 재실이다.  지금 재실은 연산면 임리 숲마을에 있다. 이곳은 신독재가 후학을 가르쳤다는 고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길은 기와집 동쪽으로 따라 가며, 이 길은 신도비와 묘소로 가는 길이다.



길 가에 서 있는 신독재 신도비이다. 팔작 지붕 모양의 가첨석이 얹어 있고, 연화문이 조각된 농대석 위에 백 대리석의 비신이 세워졌다.


뒤 쪽 묘가 신독재 김집 선생의 묘이고, 앞에 있는 묘는 후처 덕수이씨 묘다.   


문경공 신독재 김집 묘다.


묘표이다. 전면에 文敬公愼獨齋金集之墓라고 쓰여 있다.


동쪽에 있는 문인석이다.


서쪽에 있는 문인석이다.


묘소에서 앞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묘소 앞이 딱 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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