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유교문화활성화사업단 주관 향교서원 전문가 양성 교육과정 교육이 9월 11-13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전국 향교 서원으로부터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이 교육 과정 중 창덕궁 현장답사가 있었다.
우리 일행 100명은 9월 12일 오후 버스 3대로 나눠 타고 서울 한강대교를 건너 숭례문(崇禮門)을 지나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 도착했다. 흰 뭉게구름이 아래 돈화문은 편안하게 일행을 맞이하는 듯하다. 돈화(敦化)는 백성을 정성스럽게 깊이 있게 가르치고 이끈다는 뜻이니 조선왕조의 정신이 그 속에 있다.
돈화문에 입장하자 우리 일행은 50명씩 두 조로 편성했고, 두 해설사가 한 조씩 맡아 해설을 했다. 내가 속한 B조 해설사는 30대 후반 쯤 보이는 여성이었다. 먼저 목에 거는 작은 무선수신기를 하나씩 지급했다. 외국인도 아닌데 왜 수신기를 줄 가 처음에는 의아했다. 수신기 스위치를 켜고 이어폰 잭을 꽂으니 잡음하나 없이 잘 들린다. 육성을 들을 때는 멀리 떨어지면 듣기 어려우나, 수신기를 사용하니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이 해설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 교육프로그램의 목적은 향교 서원 전문 해설사 양성에 목적이 있어 해설을 어떻게 하나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해설 내용뿐만 아니라 해설자의 태도, 장비, 방법도 배워야 한다.
우리 해설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스크랩북을 펼쳐 보이면서 "창덕궁의 타임머신"이란 요약 연표를 보여주면서 차근차근 알기 쉽게 창덕궁의 역사를 설명해줬다. 그는 "창덕궁은 태종 1405년 이궁(離宮)으로 창건했으나 임진왜란에 궁궐이 모두 불타 창덕궁은 바로 재건하여 270여 년간 정궁으로 역할을 했다. 산자락에 지은 집은 자연 지형에 순응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다"라고 했다.
바로 옆에는 천연기념물제 472호로 지정된 회화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회화나무를 심으면 큰 인물이 나 큰 학자가 나온다고 한다. 담 너머에는 한옥마을로 유명한 북촌마을이 보였다.
그 다음 들린 곳은 규장각이다. 정조가 1776년 창덕궁의 후원에 규장각을 지었으나 멀리 떨어져 있어 5년 후 돈화문 근처에 또 하나의 규장각을 지었다고 했다. 수원화성을 건설했고 대유학자였던 정조께서 다산 정약용과 이 자리에서 정사를 토론했을 것을 떠올려 본다.
해설사는 우리 일행이 향교서원에서 왔음을 알고 서까래에 있는 문양을 보면서 육엽연화(연꽃)무늬는 군자(君子)를 의미한다고 했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줄 알았으나 이번 답사에서 6엽 연꽃이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다음은 책을 검사했다는 검서청을 둘러보았고,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셨다는 선원전(璿源殿)에 갔다. 어진은 대부분 화재로 불타고 다섯 어진이 있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에 있고 이곳에는 비어 있다고 했다.
다음에 간 곳은 내의원이 일했던 약방이다. 이곳에서 일 했었을 최고의 명의 허준이 생각났다. 허준은 서자로 태어나 의학의 길을 택했다. 동양 최대의 의서라는 〈동의보감〉을 1610년(광해군 2) 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의주까지 따라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정1품까지 승급했다.
내의원에서 여자 환자는 남자 의원이 여자를 진맥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자 환자를 진료 했던 건물은 모퉁이에 있는 작은 건물이라고 가리킨다. 이곳에서 의녀(醫女)가 여자 환자를 진료했다고 한다. 대장금이 떠 올랐다. 예기에 남녀는 7세가 되면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밥도 같이 먹지마라하고 있다 (七年, 男女不同席, 不共食). 지금 시대로 보면 뒤떨어진 사고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시대에는 맞는 수칙일지 모른다.
일행은 인정문(仁政門)을 지나 인정전(仁政殿) 앞에 섰다. 인정전은 인(仁)으로 정치를 하는 궁궐이라는 뜻이다. 유교의 가르침으로 정치를 했던 조선은 500년 이어졌으니 절대로 실패한 왕조가 아니고 성공한 왕조라고 한다. 일제가 우리를 폄하려는 식민사관으로 유교의 나라 조선은 망했다고 한다. 이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조선왕조는 유교의 이념으로 통치한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봐야할 것이다. 인정전 용마루에는 5개의 이화문양이 보였다. 이화는 대한제국의 꽃이라고 한다.
이어서 왕비의 거처가 있는 대조전으로 갔다. 용마루가 없음은 왕은 용을 상징하므로 한 지붕 위에 용이 둘이 있을 수 없어 용마루가 없다고 한다.
해설사는 대조전과 연결된 흥복헌(興復軒)에서 흥복(興復)과는 반대되는 비운의 역사이야기를 해줬다.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했다.
국왕이 평상시 거처하던 희정당(熙政堂)에 갔다. 희정당 정문은 1903년 고종이 자동차를 타고 현관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만들었으며, 내부는 의장이 서구적으로 양탄자를 깔고, 전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운의 덕혜옹주가 말년에 살다 세상을 떠났던 낙선재(樂善齋)를 방문했다.
창덕궁 답사를 마치면서 훌륭한 해설사의 도움으로 우리 일행은 역사의 현장을 실감나게 관람했다. 우리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해설사는 처음이라면서 재미있고 알찬 해설을 해준 해설사를 칭찬했다. 이에 반하여 향교와 서원은 6-70대의 남성이 틀에 박힌 듯이 재미 없는 해설을 하지 않나 반성해 본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다.
해설사가 스크랩북을 펼쳐 보이면서 창덕궁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서까래에 있는 육엽연화(연꽃)문양은 군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내의원이 근무했던 약방이다.
약방 앞 모퉁이에 있는 이 건물에서 의녀가 여자환자를 진료했다.
인정전 정문이다.
인정전 앞에서 B조 일행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인정정 안에 용상과 일월오봉도가 보인다.
임금의 평소 거처인 희정당 앞쪽이다.
희정당 측면이다.
희장당 내부이다. 카펫트가 깔리고 현대식 가구, 전등이 보인다.
왕비가 거처했던 대조전이다.
순조가 쓴 대조전 현판이다.
대조전에 연결된 흥복헌이 가운데 있다.
해시계이다.
궁궐의 부엌이다.
덕혜옹주와 이방자여사가 말년에 살았던 낙선재이다.
낙선재의 창문 문양이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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