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과 사진은 2009년 항조우에서 황산까지 여행기이다.
호텔로비를 나서자 아침부터 후덥지근한 공기가 가슴에 와 닫는다. “상해라는 곳은 좀 덥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곳에 오고서야 실감이 났다. 오늘이 7월 9일 아직 한 여름이 아니지만 매일 최고 기온이 38-39도라고 하니 나에게는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더운 날씨이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시설은 좋지는 않지만 규모로 보면 20층 가량 되어 보이는 대형 호텔이었다. 세계경제불황과 함께 신종 인플렌자 발생 때문인지 호텔은 별 손님이 없는 듯 했다. 세계 최대인구를 가진 2000만명이 사는 도시, 중국의 개발개혁 정책의 성공 사례을 대표하는 도시, 그런 도시에서 첫 날 밤을 보냈다.
눈을 뜨니 여기 시간으로 5시이다. 오늘도 아침 운동하려 호텔 문을 나섰다. 다 도시가 그렇지만 이곳은 더욱 흙 한번 밟기 어렵고 나무하나 풀 한포기 보기 쉽지 않다. 먹고 살기가 급해서 그랬을 가? 그냥 잠자고, 먹고, 일하면 되는 편리성만 쫒다 보니 볼거리는 사치라서 그랬을 가? 웃통 벗은 젊은이들이 화물차에 폐 종이를 차에 실고 있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땀이 나는데, 옷 입어 봐야 세탁하기만 해야 하니, 안 입고 살면 실용적이다. 이런 철저한 실용주의가 요즘 중국을 일으키고 있다지만 남 보기에는 좋지 않다. 체면도 필요 없는 세상이니 보기가 안 좋다.
육상철도를 걷어 내고 그 위에 고가철도가 보였다. 세계의 다른 도시와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 고가도로가 많다는 것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소수는 희생되어도 무방하다는 사회주의를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많은 인구를 통치하려고 하니 개인의 자유는 어쩔 수 없이 제한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납득이 잘 안 간다. 한편 강아지를 끌고 나와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땀이 나지 않을 만큼 걷기를 한 후 호텔로 돌아 왔다. 6시 반부터 식사를 하고 7시까지 버스에 타라고 한다. 세면을 하고 호텔 식당에서 중국식에 가까운 서양식 차림의 아침식사를 했다. 식성이 좋은 나는 가릴 것 없이 죽 한그릇, 만두, 삶은 고구마, 과일, 등 다 먹을 만했다. 중국여행은 유럽이나 북미와 달리 같이 김치가 없지만, 비슷한 음식이라 식사에 불편이 없어 좋다. 어제 동방명주와 신천지 구경을 했지만 오늘부터 본격적인 여행이다. 집 나서면 고생이라고 하지만 오늘의 스케줄은 체력 검정 테스트라도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맨 먼저 도착한 곳이 우리에게는 윤봉길의사가 일본군 대장에 도시락 폭탄을 던져 유명한 홍구공원이다. 지금은 중국의 봉건사회를 비판했던 상해 출신 유명한 소설가 노신의 이름을 따서 노신공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원에 들어서자 참 사람들이 많았다. 기체조하는 사람들, 부채춤 운동하는 노인, 배드민턴 치는 사람, 전통악기를 불며 노래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런 무더위에 어떻게 살 가? 나로서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들은 공원에서 운동하며, 담소하고 노래하며 노년을 즐기고 있지 않는 가! 예전 윤의사가 폭탄을 투척할 때의 동영상으로는 이곳이 연병장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나무가 무성한 숲이었다. 공원 입구에서 얼마 가지 않아 한 무리의 노인들이 배드민턴을 치는 곳을 지나자 안내원은 매헌이라고 간판이 붙은 윤의사의 기념관을 안내하였다. 매현기념관에는 젊은 조선족 아가씨가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 일행에게 윤의사의 항일운동을 설명해 준다. 윤보선 대통령이 준 훈장과 상패가 보였다. 이번 여행을 같이한 덕수 친구는 윤의사가 자기와 같은 마을 출신이라며 일행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 일행은 두 번째 방문지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임정 청사가 있던 곳은 옛 상해 구 시가지로 불란서가 점유하고 있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는 임시청사는 1층은 회의실, 2층은 임정수반의 집무실, 3층은 방문객의 숙소로 각층의 면적이 15평이나 될 가 할 정도로 듣던 대로 조그마했다. 김구선생의 동상이 1층에 있고, 2층에는 김구선생의 모형조각품이 있었다. 김구선생을 비롯한 불굴의 정신이 있어 오늘 날 우리가 있다고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한다.
다음 행선지 비단판매장에는 12시 45분에 도착했다. 비단장사 왕서방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의 비단은 지금도 여전하였다. 나는 3만 원짜리 솔더를 구입했다. 하늘은 희리고 더운 바람은 바닥 시멘트에서 올라온다. 비단판매장에서 식당까지 3-4분 거리지만 무더위 체험이다. 비단 판매장 2층에 있는 식당에서 빡빡한 일정 때문에 점심식사를 30분 만에 했다. 부족한 반찬을 더 달라면 하지만 이곳도 밥을 제외하고 다른 반찬은 반찬이 아니라 요리이다. 미리 돈을 줘야 반찬이 추가로 나온다고 한다. 여행사의 팩케지 상품 여행에는 불가피하게 일정 상품판매점을 방문하게 된다. 항주로 떠나기 전에 진주판매장을 방문하였다. 우리 일행 28명을 위하여 비단판매소에서도 여기 진주 판매소에서도 미인들이 상품 구입에 앞서 패션쇼를 보여 줬다. 비싸서 그런지 비단과 달리 진주를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했다.
다음 행선지는 송나라 때 수도인 항주이다. 상해에서 항주까지는 고속도로로 3시간이 걸렸다. 차도 많지 않고 곧게 뻗은 평지 도로지만 노면이 평탄치 않아 그런지 시속 60km를 조금 넘게 달렸다. 상해에서 항주까지는 전혀 산이 보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같이 논이 많고 밭에는 옥수수, 콩도 보인다. 비닐하우스에 포도나무도 있었고, 수박을 재배하는 곳도 있었다. 끝도 없이 넓은 농토다. 이 넓은 땅에 물은 양쯔 강을 끼고 있어 넘쳐 나는 곳으로 1년에 2번씩 농사를 질 수 있으니 천혜의 땅이다. 이 천혜의 땅에서 가난하게 살면 정치가 잘 못되어 그럴게다.
중국은 국부인 모택동이 물러나고 등소평이 등장하여 개인이 농토를 소유는 못하나 경작을 할 수 있게 하여 일한만큼 가질 수 있는 자본주의 제도를 마련하였다. 농촌에는 2-3층 건물의 농촌주택이 여기 저기 보인다. 넓은 땅이지만 주택에는 정원이 없다. 1층은 습도가 높아 살지 않고 주거는 2층과 3층에서 거주한다고 한다.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농촌주택 볼거리가 없다. 다 같게 살아가야 하는 공산주의가 집도 같게 만들었고, 다양성이 없어 볼게 없어 재미도 없다.
상해특별시를 벗어나자 절강성이다. 절강성 입구에는 톨게이트가 있었다. 도로 공사 노동자들이 맨 땅에 웃통 벗고 들어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네들은 단잠을 달콤하게 자고 있다고 하겠지만 차에서 바라보는 나에게는 왠지 노동자들은 인권이 없이 사람대접 못 받고 사는 구나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안내원은 항주의 자랑을 늘어놓는다. 중국 23개성에서 가장 잘 사는 성이 절강성이라고 한다. 절강성의 수도가 항주이다. 항주 사람은 중국의 유태인이라고 한다. 특히 중국 최고의 부자의 4/3은 절강성 오주 출신이라고 할 정도로 이곳 출신 부자가 많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 뇌물이 가장 잘 통하는 곳이 또한 여기라고 한다. 항주는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중국에는 송나라가 있었으며, 송나라의 수도가 항주였다. 항주는 인구 400만으로 상해의 인구 2000만에 비하면 작은 도시이다.
항주에서 먼저 방문한 곳이 吳山이다. 오산은 상해에서 항주까지 처음 만나는 산이다. 100미터도 되지 않을 가 하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오산은 오나라의 손권이 진을 친 곳으로 유명하다. 吳山大觀이란 글자가 벽에 보였다. 오산에는 강남의 4대 누각 중에 하나인 성황각이 있다. 성황각은 옛 건물은 없고 시멘트로 새로 지은 건축물이었다. 천천히 오르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 바라보니 전망이 그만이다. 서쪽 편에는 서호가 보였고, 동북쪽으로는 항주 시내가 들어 왔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는 말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항주가 그 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서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국과 같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지만 실제 이곳에 와 보니, 그 꿈같은 세상은 어디 있었나? 알 수 없다. 1층으로 내려오자 항주공예연구소 연구원 1만 명이 2년에 걸쳐 제작했다는 남송시대의 생활상을 그린 실물도를 보았다. 시간이 있으면 자세히 볼 수 있겠지만 주마간산 격으로 그냥 동영상만 촬영하고 나왔다.
오산을 나와 우리 일행은 인근 조선족이 경영하는 안마 업소로 갔다. 발만은 미화 10불이고, 전신은 20불을 받았다. 우리 일행 28명 중 22명이 전신을 받았고, 나를 포함한 6명만 발만 받았다. 일행 중 여자가 절반은 넘으나 단 한분만 발 마사지를 받았고 그 외 모든 여자 분은 전신을 받았다. 마사지를 하는 사람과 받은 사람과의 관계는 서비스에 대한 대가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인과 주인관계가 되는 것이다. 내 몸 편하자고 남에게 고생을 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쉽지 않지만, 적선이 아니라 그들에게 돈 벌 기회를 제공하여 주는 것이니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선일 수도 있다. 마사지를 받고 나온 한 여자는 우리가 언제 이런 대접 받고 살아 본적이 있느냐고 했다. 안마 업소에서 바로 인근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 안내원은 오늘 식사에서 특별 메뉴인 동파육과 거지닭을 이야기 했다. 동파육은 서동파가 즐겨 먹었다는 돼지고기를 오래 끓인 요리이고, 거지닭은 어떤 황제가 어린 시절에 닭서리를 가서 주인에게 쫒게 흙으로 덮어 놓고 도망친 후 다시 돌아와 먹었던 요리로 황제가 등극한 후 자신이 어린 시절 그 닭요리를 복원한 것이라고 했다. 막상 식당에 나오는 동파육은 종기 하나에 돼지고기 한점이었다. 기름기가 많다고 그 유명한 동파육을 먹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거지닭은 테이블에 1개씩 나왔다. 거지닭도 바나나 잎으로 싸서 익힌 닭고기로 우리들에게 별미의 요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다음 행선지는 물쇼와 송성가무쇼 공연장이다. 공연장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버스가 있었고, 수많은 인파였다. 안내인을 따라 노천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물쇼라? 어떻게 하는 공연일 가 궁금했다. 더운 날씨에 많은 인파가 공연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있었다. 일단의 스님 복장을 한 사람들이 부처 동상을 메고 무대에 오르면서 공연은 막이 올랐다. 힘차고 요란한 음악이 흘러 나왔고 무희들이 나와 분위기를 잡았다. 방수 마이크를 든 사회자는 연신 분위기를 띄웠다. 잠시 후 하늘의 이곳저곳에서 분수가 물을 내뿜었다. 물바가지를 든 사람들은 물을 담아 옆 사람에게 뿌렸다. 음악과 함께 물 소동으로 한 여름 밤의 더위를 즐기는 축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이들과 하나 되어 물 속을 뛰어 들고 싶었지만 카메라 때문에 먼발치로 물러섰다.
물쇼가 끝나자 이웃에 있는 송성가무쇼 공연극장으로 들어갔다. 관중이 엄청났다. 어림하기 쉽지 않으나 관광버스 숫자만으로 보아도 100대만해도 3,000명은 넘을 것 같다. 우리의 좌석은 미리 예약을 하여 우리 자리가 있었다. 출연진이 300명이나 되는 중국에서 가장 큰 공연이라고 했다. 뉴욕에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이 있다면, 중국 항주에 송성가무단 뮤지컬이 있다고 할 정도로 송성가무단은 유명하다고 한다. 백사와 청사의 이야기, 송나라 황제의 생일잔치, 금나라가 침공했을 때 악비의 전쟁영웅 이야기, 아름다운 서호, 녹차의 고향, 춤과 서커스, 끝으로 많은 한국관객을 위한 아리랑 북춤도 보여 줬다. 짜임새는 다소 부족한 듯도 했지만 영상 함께 펼치는 공연은 볼만 했다. 빗물이 뿌리고, 무대에 말을 타고 등장하고, 대포가 관객을 행해 실감나게 포를 발사하는 등 실감이 나는 공연이었다. 그 많은 관객에 거대한 공연을 보면서 중국이란 힘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한글자막이 보이고 아리랑 북춤도 공연하는 등 한국의 위상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여행은 4박5일에 기본경비가 30만원이고 추가 비용이 10만원으로 총 부담하는 개인 비용이 겨우 40만원으로 거품 없는 여행사(노란풍선) 패키지 상품으로 참가했다. 이 공연을 보면서 비행기 티켓, 관광버스 대절료, 숙박비, 그리고 이런 공연 관람료까지 포함된다니 거저 구경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훌륭한 공연을 보면서 내가 태어난 “대한민국이 역시 좋은 나라”로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공연이 끝나니 거의 밤 10이다. 바로 숙소를 가는 것이 아니다. 내일의 일정을 위하여 밤 10시에 항주에서 황산으로 떠났다.
우리 버스는 텅 빈 고속도로를 계속 달렸다. 간간히 농촌 시멘트 집이 보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한 밤중에도 불빛이 있지만 여기 불을 킨 건물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이 사람들은 일찍 잠을 자는 것일 가? 아니면 전기가 비싸 켜지 못하는 걸가? 아무튼 어디를 가나 건물 안에는 어두웠다. 상해에서 항주까지는 산하나 없는 오직 들판뿐이라서 구경거리가 하나도 없었고, 다시 항주에서 황산까지 3시간 달렸지만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을 달려 구경거리는 하나 없었다. 아침 7시부터 달린 버스는 밤 12시 46분이 되어서 호텔 앞에 섰다. 여행이란 고생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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