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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중국여행(쿤밍, 따리, 리강, 상그릴라)

백두산과 북경 관광하면서 물건 사기

by 仲林堂 김용헌 2013. 8. 10.

백두산과 북경 관광하면서 물건 사기


  연변이란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연길(延吉)이란 이름 생소했다. 지도를 펴놓고 보니 함경도 북쪽에 있었다. 인구가 겨우 40만밖에 안 되는 소도시에 비행기가 뜬 다니 얼마나 많은 한국관광객이 찾는지 추측이 된다. 우리 민족의 뿌리라고 하는 백두산과 독립군이 일제와 싸웠던 땅을 밟아보고, 그 땅을 지키고 있는 조선족의 삶, 그리고 개혁 개방의 길로 들어선 중국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2001년 9월6일 연길 공항을 내렸다.


  일행 버스가 시내로 들어서자 한글과 한자를 같이 쓴 간판이 들어 왔다. 그것도 한글이 한자 보다 위에 있는 것이 놀랐고 반가웠다. 비행기에서 점심식사를 했지만 바로 에서 식당으로 갔다. 식사 한지 얼마 안되어 먹을 수 없다고 하자 중국에서는 손님 대접 잘 받으려면 많이 남겨야 한다고 했다. 음식쓰레기가 문제인데 하면서도 중국은 먹거리가 풍부한 나라라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나서 연길에서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달려 40분만에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도시 도문에 도착했다. 누렇게 물든 가을 풍경이 한적하고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도문은 함경북도 맨 위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작은 도시로 두만강을 경계로 남쪽은 북한이고 북쪽은 중국이다. 도문에서 두만강을 지나 북한으로 가는 다리가 있었다. 두만강의 중국 쪽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데이트하는 연인도 목격할 수 있었지만 강 건너편으로는 목탄을 때는 듯한 시커먼 연기를 일으키며 가는 기차와 한 두 명의 애들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 다리 중간의 북한과 경계지점까지 가서 다리 한발을 북한 쪽으로 내딛지 중국 경비원은 물러나라고 제재했다. 거기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우리 일행 버스가 북한으로 가는 다리 옆에 주차하자 상인들이 올려 왔다. 화장실이 어디라고 가르쳐 주면 나올 때 물건 사지 않으면 안 된다며 떼를 쓴다. 버스에 오르자 꽃제비로 보이는 10살 남짓한 애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서도 그의 눈망울은 원한에 차 있었다. 더 이상 이런 아이가 없기를 바라며 도문을 떠났다.


  저녁 식사는 북한사람들이 직접 경영한다는 두만강식당에서 했다. 중국 땅에서 신변에 대한 아무런 부담 없이 북한 식당에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느꼈다. 반면 북쪽 사람들은 주문한 식사를 제 시간에 맞춰 차려만 놓았을 뿐 더 이상의 서비스는 없이 약간의 경계의 눈빛이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밥과 반찬을 모두 차례 놓았다. 밥은 이미 식어 찬밥이 되었다. 먼발치에서 우릴 보기만 하는 종업원들을 보면서 그들은 우리 일행으로부터 부럽게 느꼈을 것만 같았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도중에 한 시간여를 달리면 상점이 있었으며 거기서 화장실 용무를 볼 수 있었다. 명월저수지를 지나면서 외딴 집에 정차했다. 화장실이란 것이 바닥에 통나무 몇 개 느려 뜨려놓고 포장을 둘러 쳐 있는 간이 화장실이었다. 버스가 서자 장뇌삼, 상황버섯, 음료수, 땅 등 간단한 식품을 팔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관광객에 팔려는 것은 주로 장뇌삼이었다. 장뇌삼은 일반 삼보다 비싼 삼으로 알려졌다. 우리 일행 중에 한 사람은 장뢰삼을 샀으나 나중에 확인 해 보니 잔뿌리를 본드로 붙어 놓았음을 알았다.


  백두산 천지를 보고 나서 장백폭포를 본 후 내려오자 노천온천 물에 계란을 삼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한국말을 몇 마디 배운 중국 장사꾼들이 우리를 붙잡았다. 하나라도 팔려고 줄기차게 따라 붙었다. 이곳에서 물건값은 종잡을 수가 없다. 같은 물건을 10만원에 팔기도 하고 만원으로도 팔기도 한다. 버스가 떠날 때쯤 해서는 몇 만원짜리가 몇 천원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제 값에 물건을 사려면 최후까지 버티는 것이다. .


  현지 안내인은 북한 사람이 경영하는 안궁우황환만이 진품이라며 우리를 북한상품전시관이란 곳으로 안내를 했다. 현지 안내인이 잠시 둘러보도록 안내를 한 다음 의자에 앉으라고 한다. 잠시 후 한국에서 왔다는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나오더니 우황청심원과 안궁우황환을 선전했다. 안궁우황환 공장을 김일성이 직접 방문했다하며, 김일성이 문익환 목사에게 선물했다는 북한에서 최고의 상품이라고 믿어달라고 하며, 사향의 배꼽에서 추출한 묘약으로 한번 먹으면 평생중풍을 예방할 수 있다고 선전을 했다. 안궁우황환과 우황청심환만을 판매하고 기타 북한 상품은 진열만 한다고 했다. 우황, 녹용 등은 동물에서 만드는 약으로 동물보호를 위해 국제적으로 수입 금지품이라고 했다. 현지 안내인은 한통속으로 사라고 거들었다.


  다음 행선지는 우리 선조가 독립을 위해 싸운 혜란강 일송정이 있는 용정이었다. 대성중학교는 용정중고등학교로 변해있었다. 이 학교는 조선족 학생만 다닌다고 했다. 용정에는 조선족만 다니는 학교가 몇 개 더 있다고 한다. 1974년에 복원한 대성중학교 2층에는 독립운동 활동의 사진이 잘 전시되어 있었고, 안내원의 설명을 듣자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대성중학교와 선구자가 있었던 일송정인 줄 알았으나 일송정은 차창 밖으로 가리키는 손가락 관광으로 끝내고 안내원은 곰사육장으로 안내했다. 국가에서 경영하는 곰사육장으로 믿을 수 있다고 안내원은 선전을 한다. 곰사육장의 안내원은 우리를 곰 사육장을 둘러 본 다음 강택민 사진이 걸쳐 있는 방으로 안내한 후 곰 자랑을 하고 나서 곰쓸개를 판매했다. 우리 속에서 인간을 위하여 쓸개를 내주며 살아 가는 곰이 불쌍하고, 사람들이 너무 한다 싶었다.


  연변에서 일정을 마치고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간 곳은 北京技藝(북경써커스) 관람이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서커스가 아니고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온통 한국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사회는 중국어와 영어로 할뿐 한국어는 없었다.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 국력의 신장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다음날은 만리장성, 용경협, 이화원이 단 하루 관광일정이었다. 이 유명한 곳을 어찌 하루에 3곳을 볼 수는 없었다. 단지 점만 찍는 지나가는 관광이었다. 안내원이 관심을 두었던 곳은 이런 관광코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점심식사 때 쇼핑과 중국한방병원방문이었다. 점심 식사 후 방문한 곳은 외국관광객을 대상으로 상품을 파는 곳이었다. 모든 점원들이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 특히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품목은 흉터와 기미를 없애준다는 화장품이었다. 의약품도 아닌데 어떻게 기미를 없앨 수 있을 가 의문이 들었다. 다음에 간 곳은 중국한방병원이다. 토요일 저녁 무렵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퇴근을 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의자가 20 여개 되는 작은 방에 들어가자 70대의 할머니가 나왔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3살 때 중국에 왔다는 이 병원의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우리 일행 모두 무료 진맥을 해주겠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모두 건강한 것 같았지만 우리를 진맥해주는 의사는 문진을 통해 어떤 병이 있나 알아내고 처방을 하고, 약재를 선전하였다.


  관광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경비 절감을 위하여 현지 물건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팩캐지 관광이다. 물건도 좀 팔아줘야 현지 안내원의 기분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많은 관광객들은 이들 장사꾼의 속임수에 잘 넘어간다. 앞으로는 속아 주는 체는 하더라도 정말 속아 넘어가지는 말았으면 한다.  

 

2001년 10월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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