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이씨풍성군종회(회장 이종기)가 주최하고, 영주시문화관광재단(대표이사 김원택)과 수원향교(전교 송중섭)이 후원하고, 서울우유축협이 협찬한 '2024년 풍성포럼"이 9월 5일 10시 40분부터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선비세상로 1 선비세상컨벤션홀 등에서 200여명의 덕수이씨 종원, 유림, 일반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특히 수원향교 장의 36명 일행이 참석했다.
행사는 1부에서 선비세상컨벤션홀에서 개회식 선언, 국민의례, 선조에 대한 묵념, 내외빈 소개, 덕수이씨 풍성군회장 인사말, 덕수이씨풍성군회장이 영주시와 영주시장에게 감사패와 율곡 생가 암각문 탁본 증정, 주제 발표자 박상하 작가의 소개, 이재용 풍성군 전 회장의 인사말, 김원택 영주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의 축사, 김홍걸 영주향교 사무국장의 영주 선비 정신 소개, 폐회, 단체 사진 촬영 순으로 진행되었다.
2부 행사에서는 점심 식사 후 부석사 관람, 소수서원 관람, 문화관광재단 방문하고 저녁 식사까지 이어졌다.
이번 행사에 참석자들은 전세 버스가 서울 사당역에서 2대, 성남 시청 앞에서 1대, 성남 덕수빌딩 앞에서 1대, 영주시에서 1대, 수원여성회관 앞에서 1대 등 총 5대의 버스를 이용하여 행사장에 도착했다.
이종기 회장은 인사말에서 "오늘 퇴계와 율곡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우리나라 유학의 양대 산맥인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영주에서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율곡의 후손과 유림이 찾아왔습니다. 박상하 작가의 주재 발표와 김홍걸 영주향교 사무국장의 영주 선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세미나 발표 후에는 부석사, 소수서원 등 영주의 문화유산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번 행사를 통하여 영남파 문중과 기호파 문중이 서로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재용 풍성군종회 전 회장은 인사말에서 "오늘 퇴계와 율곡이 만난 지 484년 만에 그 후손이 만났습니다. 율곡 선생은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퇴계 선생이었습니다. 두 선생께서는 나라가 어려울 때 최우선으로 후배양성을 삼았습니다. 정치에 눈먼 사람들이 퇴계와 율곡 왜곡하여 비판도 했지만 두 분은 서로 토론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동지였다. 때마침 영주에서는 제2의 퇴계 운동을 펼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혼탁한 이 세상에 두 선생님의 올바른 선비정신 운동이 펼치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훌륭하신 박상하 작가님의 좋은 말씀을 듣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김원택 영주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우리나라 유학의 두 거두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성리학 발전에 이정표가 되었으며, 오늘 다시 선비의 고장 영주에서 '퇴계와 율곡의 만남'의 세미나는 그 의미가 크다. 영주에는 부석사, 소수서원 등 세계문화유산이 있고, 영주 사과, 풍기 인삼 등 특산물도 많으니, 오늘 하루 즐거운 소풍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인사말에 이어 이종기 풍성군종회 회장이 영주시와 영주시장 대리하여 참석한 영주문화관광재단 김원택 대표에게 감사패와 서울 서대문 율곡 선생 생가터 암각문을 표고한 액자를 수여했다. 이 암각문은 "性同鱗羽 愛止山壑"이다. 그 뜻은 저 깊은 물 속의 물고기에서 저 높은 하늘의 새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이 모두 같으니(性同鱗羽), 우리의 사랑은 멀리 산과 골짜기의 세상 끝까지 속속들이 미친다(愛止山壑)이다. 이 글은 율곡을 대표 사상이다.
주제발표를 한 박상하 발표자는 풍성포럼에서 "퇴계와 율곡으로부터 영향받지 않은 이가 없다. 이들은 세 번을 만났고,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이들의 첫 번째 만남은 1558년 2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만났다. 23살의 젊은 천재 율곡은 정계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는 58살의 학문 높은 노학자 퇴계를 무턱대고 찾아갔다. 율곡은 처가가 있는 성주에 머문 후 외가가 있는 강릉 가는 길에 예안(지금의 안동) 도산서당에서 만났다.
당시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시문이 남아 있다. 율곡에 퇴계에 바친 시는 퇴계를 성현에 버금가는 노학자라며 젊은 선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높이고 있다. 자신도 높은 학문을 배우고자 한다며 물리치시지 마시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퇴계는 율곡을 반갑게 맞이한다. 퇴계는 율곡을 만나 자신이 활짝 깨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젊은 천재 율곡이 문득 자신을 찾아주어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며, 율곡에게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성리학에 힘쓰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계속되는 비에 거기서 사흘을 머물렀다.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 후 불과 두 달 후 퇴계가 명종에게 상소를 올리려 한양에 왔을 때 만났다. 둘은 성리학에 관한 문답도 주고받았다. 퇴계는 율곡이 묻는 "올바른 공부란 주자를 정통으로 하는 성리학이어야 한다."라고 했다.
세 번째 만남은 명나라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제술관으로 퇴계가 한양에 왔을 때 갑자기 명종이 승하여 퇴계는 임금의 국장을 맡아 명종의 행장을 지어 올리었다. 퇴계는 새로운 벼슬이 내려지기도 전에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율곡은 퇴계가 한성에 머물고 있을 때 조정에 남도록 설득했었다.
박 작가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퇴계는 연산군, 중종, 명종, 선조 연간의 시대에 이른바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의 한복판에 살았다. 그와 같은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고육지책으로 출사에 임용과 사직을 거듭했다. 반면 율곡은 종중, 인종, 명종, 선조 연간의 시대에 사화가 끝난 시대를 살았다. 율곡은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등 중앙 관직의 주요 요직을 대부분 거쳤다. 그는 임금에 올리는 직간은 물로 대신들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퇴계는 국가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군(聖君)이라고 보았다. '무진육조소'에서 군왕이 갖추어야 할 학문과 덕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나가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율곡은 오로지 백성을 편안케 하여야 한다. '만언봉사'에서 정치 현실이 교화보다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는 "퇴계는 '지키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라는 보수의 시작이고, 율곡은 '바꾸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 진보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퇴계는 이 땅에 보수의 씨앗을 심은 올곧은 원칙의 삶을 보여줬고, 이 땅에 처음 진보의 씨앗을 심었던 율곡은 청렴결백의 삶을 보여줬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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