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통일신라 때 선종불교가 꽃 피웠던 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

仲林堂 김용헌 2025. 6. 24. 07:38

석등, 5층석탑이 있고, 그 뒤에 3층석탑이 3기가 있고, 비각 안에 무염대사비가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천년을 넘게 성주사지를 지킨 5층 석탑이다.
미인을 닮은 날렵한 석등이다.
3기의 석탑 중 가운데 있는 중앙석탑이다. 안정감이 있는 모습이다.
국보인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이다. 우리나라 비석 중 가장 큰 비석이라고 한다. 무염선사가 서기 888년 돌아가셨으니 돌아신지 1137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비문이 뚜렸하게 남아 있다. 비석이 단단한 오석이라서 천년이 넘었지만 잘 보존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보령은 오석이 많이 나는 산지이다.
화강암 비석이다.
앞쪽이 중문이고, 그 뒤에 목탑, 목탑 뒤에 금당이 있고, 맨 뒤에 강당이 있다.

 (사)화성연구회 회원과 함께 2025 국가유산지킴이날 기념식에 참석차 수원에서 관광버스로 6월 22일 9시에 출발하여 충남 보령시 성주면 심원계곡로 93 성주사지 천년역사관에 도착했다. 천년역사관에서 기념식을 한 후 성주사지를 일행과 함께 둘러보았다.

 

이곳은 백제시대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했으며, 전사한 영령을 위로하는 호국사찰이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 당나라에서 선종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無染)대사가 머무르며 불사를 크게 일으켰고, 신라 문성왕이 성인이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성주사(聖住寺)로 바꿨다고 한다. 불교가 흥했던 통일신라 시대 선종을 대표하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로 알려졌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후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폐사되고, 지금은 목조 건물은 다 없어졌고, 돌로된 비석, 석탑, 주춧돌만 남아 있다. 

 

기념식 후 일행과 함께 성주사지 입구에 들어서자 성주산이 높게 병풍과 같이 있고, 그 아래 넓은 평지가 넓게 펼처져 있었다. 이 넓은 터가 모두 절터라니 놀라울 정도 규모다. 넓은 터에 석탑 외롭게 여러기가 터를 지키고 있었다. 석탑이란 소망의 표현이 아닐 가? 천년의 바램이 그 안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또 부처님의 마음을 끝없이 전하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 절터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유물은 비각으로 보호하고 있는 성주사지 대낭해화상탑비이다. 이 비는 무염스님의 생애와 공덕을 최치원이 쓴 비이다. 최치원도 13살에 당나라에 유학가서 돌아온 최고의 학자이다. 이 비석에 관한 해설사는 이 비석에 관한 다음과 같이 해설을 했다. "최치원에게 찬하여 요청했으나 최치원은 나는 짧은 줄의 두레박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깊은 샘물의 무염대사를 찬할 수 있겠느냐고 사양했다고 한다. 거듭 요청을 받고 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그냥 꾸민 말이 아니라 5,000여 자의 비문 중에  있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임금이 이 절의 사찰 이름을 성인이 사는 절이라는 성주사(聖住寺)라고 지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무염대사의 위상이 어떻했나 짐작이 간다. 

 

천년역사관에서 성주사찰의 모형도를 보니 당시의 사찰의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그간 나는 스스로 국내 많은 곳을 다녀보았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성주사지를 보면서 국내에도 볼 곳은 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