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왕릉에 버금가는 윤관 장군의 묘

仲林堂 김용헌 2019. 3. 21. 17:59

파주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3월 19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윤관 장군묘를 찾았다. 혜음로 도로변에 인접해 있어 접근이 쉬웠다. 주차장에 들어 묘역을 둘러 보니 규모가 대단하다. 그 규모가 왼만한 임금의 릉보다 훨씬 크다. 윤관 장군이 위대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후손이 잘 나가기 때문이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묘역도 넓을 뿐만아니라 석물이 많고 컸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흥하던 시대로 화장을 하고 매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묘가 거의 없다. 윤관의 묘는 고려시대의 보기 드문 묘라고 할 수 있다. 


이 묘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윤관 묘 뒤에 청송심씨의 묘역이 있었다. 이곳이 원래 윤관 장군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한 윤관의 후손인 파평윤씨 가문이 청송심씨의 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윤관장군 묘의 곡담을 높게 설치하면서 두 가문이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 후  두 가문은 파평윤씨가문에서 2,500평의 땅을 제공하기로 하여 타협하고 청송심씨 묘는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윤관 장군은 여진을 물리쳐 두만간 넘어 700리까지 몰아내고 9성을 축조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화평을 하기로 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왜냐하면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고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도 화평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9성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할 경우 백성들의 원망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있었다.


홍살문이다. 묘가 엄청난 규모이다.



좌측은 윤시중의 교자총(가마 무덤)비이고, 우측은 윤시중의 전마총(말 무덤)이다. 나는 가마와 말 무덤은 처음 여기서 본다.


고려문하시중 검평백 문숙공 윤관 장군 신도비


사당 외삼문이다. 사당은 문이 잠겨 출입할 수 없었다.


청송심씨문중이 묘를 이전할 수 있는 대토 2,500평을 받고 화해했다는 내용이다.



가까이 본 윤관 묘역이다. 임금의 묘보다 석물이 더 좋다.


가운데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근래에 세운 석물로 보인다.

 

본래 있던 문인석이다.



이곳에 청송심씨의 묘가 있던 자리이다.


곡담이 높이 쌓아 청송심씨의 묘의 전방이 가려 싸움이 시작되었다.


묘 앞에서 바라 본 전면이다. 좌청룡 우백호는 찾을 수 없다.


묘역 동쪽에 시비원(詩碑園) 표지석이다. 이곳에 윤관장군을 칭송하는 한시를 지여 돌에 새겨 전시한 공원이다.


시비(詩碑) 공원까지 조성했으니 대대한 가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숭조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과시하려는 하나의 사치로도 보인다.